- 구글 서치콘솔 - 빙 웹마스터툴툴 몽고족의 토템 까마귀와 여진족의 토템 까치가 우리 민족의 인식 속에 흉조와 길조로 자리매김하게 된 배경과 영향 :: 예쁜 쑤님 삶의 소통 공간
  • 2024. 7. 21.

    by. 예쁜 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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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차 ]

       

       

      까마귀와 까치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문화와 민족 속에서 서로 다른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몽고족과 여진족의 토템으로서 이 두 새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인식 속에서 흉조와 길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 배경과 문화적 영향,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인식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몽고족의 토템 까마귀의 배경과 영향

       

       

       

       

       ▶ 몽고족의 역사와 까마귀의 상징성

       

      몽고족은 고대부터 유목 생활을 하며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들은 자연의 동식물들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 중에서도 까마귀를 중요한 토템으로 삼았습니다.

       

      까마귀는 지혜와 보호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몽고족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 까마귀는 종종 신비로운 존재로 등장하여 부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까마귀는 몽고족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일상과 의례 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 까마귀의 흉조 인식

       

      그러나 다른 문화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까마귀가 죽음이나 불운을 상징하는 새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우리 민족에게도 영향을 미쳐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몽고족의 긍정적인 까마귀 인식이 우리 민족에게 전달되기 전에, 이미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로 인해 까마귀는 종종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고, 이를 피하려는 노력들이 문화와 풍습에 반영되었습니다.

       

       

       

       

       ▶ 몽고족의 문화적 영향

       

      몽고족의 문화와 전통은 우리 민족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몽고족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문화 요소가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몽고족의 긍정적인 까마귀 상징성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몽고족의 까마귀 숭배 전통이 일부 전달되었으나,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와 충돌하면서 혼재된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2. 여진족의 토템 까치의 배경과 영향

       

       

       

       

       ▶ 여진족의 역사와 까치의 상징성

       

      여진족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족으로, 현재의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걸쳐 있었습니다.

       

      이들은 까치를 중요한 토템으로 여겼으며, 까치는 행복과 번영, 그리고 좋은 소식을 상징하는 새로 인식되었습니다. 여진족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 까치는 항상 행운과 긍정적인 사건을 가져오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까치는 여진족의 생활 속에서 희망과 복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까치의 길조 인식

       

      우리 민족에게도 까치는 길조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여진족과의 교류와 문화적 영향을 통해 까치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까치는 특히 설날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까치가 등장하는 날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잡아, 까치는 길조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여진족의 문화적 영향

       

      여진족의 문화는 조선 시대에 특히 강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조선 초기까지도 빈번하게 교류하였으며, 까치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는 여진족의 토템으로서의 상징성과 일치합니다. 까치는 또한 농업 사회에서 풍년과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아, 전통 농경 의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3. 까마귀와 까치의 인식 변화와 현재

       

       

       

       

       ▶ 까마귀의 인식 변화

       

      우리 민족의 까마귀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왔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까마귀가 단순히 흉조로만 여겨지지 않고, 지혜와 신비로움의 상징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 문화의 영향과 자연 보호에 대한 인식 변화 때문입니다. 까마귀는 이제 환경 보호의 상징으로도 여겨지며,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까마귀의 지능과 사회적 행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까마귀는 보다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 까치의 인식 유지

       

      반면 까치는 여전히 길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까치를 행복과 행운의 상징으로 보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는 까치의 생태적 특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까치는 인간과 가까운 곳에서 서식하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새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까치의 사회적 행동과 명석함이 긍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며, 까치는 현재도 행운을 상징하는 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4. 어느 스님의 만단설화( 萬端設話) - 까마귀와 까치 이야기

       

       ▶ 까마귀는 몽고족의 토템으로 우리민족은 고려시대 중국 원나라 몽고족의 침략으로 너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몽고족이 왔다가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또 너무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해하고 갔으며, 많은 곡식을 뺏아가고 수많은 사람을 잡아갔으니 어찌 기쁨의 상대로 인식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까마귀는 몽고족을 상징하니 죽음을 상징하고 흉조로 인식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까치는 여진족의 토템으로 여진족은 한반도 북방에서 우리민족과 함께 살아오던 민족이었는데, 

      고려시대에 제대로 대접도 하지 않고 업신여기며 살아오던 이민족이었으나, 몽고족에게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 여진족과 비교하니 여진족이 어찌 고마운 형제 민족이 아니었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어릴때부터 여진족과 함께 살아오던 태조 이성계의 성장 배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여진족과는 이웃으로 아주 친하게 지내고 살아왔으니, 정겨운 이웃에 대한 인식은 좋은 소식을 뜻하고 우리집을 찾아오는 손님을 상징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청나라를 일으켰던 여진족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통하여 형제의 예를 군신의 예로 바꾸자는 요구로 삼전도 치욕을 안겼던 그들도 결국 패전국이었던 조선으로부터 많은 곡식과 사람(소현세자 포함) 등의 전리품을 탈취해 가기는 마찬가지였으며, 환향녀(還鄕女)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되었으니, 역사에 영원한 형제도 군신도 없다는 사실에 만사무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진족과 신라 마의태자와의 관계에 대한 역사소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여 확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 ↓

       

      역사소설 '김의 나라' 내용 알아보기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청나라 황제의 성씨(姓氏)입니다.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말자!'는 뜻이니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한반도 남쪽의 나라 신라와의 관계를 풀어가기 위해 소설가 이상훈님이 역사소설  '김의 나라' 발간하였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였던 마의태자(김일)이 고려에 쉽게 굴복했던 아버지 경순왕과는 달리 신라의 부흥을 주도하며 강원도 인제에서 힘을 키우지만 고려의 군사력에 의하여 고립되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려 왕건의 맏딸인 낙랑공주의 헌신으로 북방으로 이주하여 아들 함보를 낳고 지금의 하얼빈인 복간수에서 여진족과 합심하여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금나라를 이루는 시초가 되며 '김의 나라'의 출발점이라는 역사 소설 '김의 나라'를 일독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M이코노미뉴스] 베스트셀러 작가 이상훈의 역사소설... '김의 나라'

      【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역사소설 ‘한복 입은 남자’, ‘제명공주’를 펴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알린 이상훈 작가가 최근 ‘김의나라’를 출간했다. 역사소설 3부 완성작인 ‘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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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족과 여진족의 토템 동물인 까마귀와 까치는 우리 민족의 인식 속에서 흉조와 길조로 각각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몽고족의 까마귀는 지혜와 보호의 상징이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흉조로 인식되었으며, 여진족의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영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겪었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보다 다양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문화적 교류와 자연 보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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